九条天:(코코아 잔을 받아든다.) ……고마워. (양 손으로 온기를 잠시 느끼고는, 향을 맡아 본다.) 인간은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지만 사실 호르몬에 많이 좌우받는 생명체인 것 같지. 돌아가야 하는데, 언제 돌아가지… 라는 생각만 하고 더 생각하기를 그만둬버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다.)
安浦杉 萌生:(제 몫의 코코아 잔을 들고 옆에 앉는다.)요컨대 더 있다 가고 싶다는 이야기군요.(그리곤 한 입 홀짝인다. 물이 약간 적었는지, 저린 단맛이 입안에 퍼진다.)원하신다면 조금 더 머무셔도 괜찮은데요.(느릿이 이어나가는, 중얼거리듯 흩어지는 말들…)곧 언니가 돌아오니까, 오래는 못 있겠지만요.
창밖의 푸른 하늘은 작위적으로 맑고, 나무 아래 그림자는 잠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매미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당신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安浦杉 萌生:(역시 꿈이 아니었던 것 같지. 여즉 기억한다, 그날 추적추적 내리던 비를, 푹 젖어 문을 두드리던 텐을. 하나 하늘은 맑고 텐은 없다. 마치 비와 함께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해답 없는 질문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열이 오르기라도 한 건지 조금 더운 것도 같았다.)
당신에게, 그리고 쿠죠 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블러 처리가 된 듯한 그 얼굴에 몸이 반사적으로 얼어붙습니다.
九条天:이상해.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해. ……. 그럴 리 없는데도.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어려워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너는 날 알고 있지. 지금 내 얼굴… 보여?
▶:그답지 않게 동요하는 표정. 아니, 저걸 표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흐릿한 얼굴은 여전히 뿌옇기만 합니다.
…눈은 어떤 색이었고, 어떤 모양이었고, 또 어디에 자리 잡고 있던지. 야스라기 메바에마저 그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당신이 가진, 쿠죠 텐에 관한 기억들 역시 하나둘씩 지워지는 중이란 것을요.
安浦杉 萌生:쿠죠, 씨…?(당황한 낯으로 반사적으로 기억을 되짚는다. 연분홍빛 머리에 눈은 어떻게 생겼었더라. 그러니까….)
九条天:아아……, 그래. 보이지 않는 거구나. (손을 뻗으려던 모습 그대로 굳어 그를 마주보았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지만, 당신은 분명 그리 느꼈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요동칩니다.
가는 침묵이 흐른 후 쿠죠 텐은 야스라기 메바에를 와락 끌어안습니다. 쿵, 쿵. 엇박자로 뛰는 심장 박동 소리.
九条天: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야. 무대에 다시 못 서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무대를 한 번이라도 봐준 팬들은 나를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어. (잠시 숨을 들이쉰다.) 오만이라고 해도, 모두가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스테이지를 바라보며 열띤 마음으로 쿠죠 텐이라고 외친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
▶:한참이 지난 후에야 쿠죠 텐은 진정한 듯 천천히 당신에게서 떨어집니다.
安浦杉 萌生:(눈이 크게 뜨이고 놀라 숨을 삼켰다. 잠ㄲ… 못다 마친 말이 맞잡으려던 손과 함께 허공을 젓는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혀끝에서 수많은 말들이 맴돈다.)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팬들이 당신을, 쿠죠 텐이라는 아이돌을 잊을 리 없잖아요.(확신 없는 어조. 목소리는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왜냐하면 쿠죠 씨, 당신은…….(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왜인지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九条天:후후. 네가 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네. (확신 없이 기억의 파편을 읊는 네 행동에 작게 웃는다.) 아마 우린 이 세계에 갇힌 것 같아. 차원의 관문도… 사용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젠 체념했다는 듯.)
安浦杉 萌生:당연하잖아요, 당신이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니까.(표정을 지운다. 평소의 여상한 낯이다.)이 세계에 갇혔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차원의 관문? 그건 또 뭐고요.(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추궁하는 듯한 어조.)제대로 설명해주세요.
九条天:(평소와 같은 표정이네. 감정을 갈무리하는 모습을 보며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하? 잠시만. 아직도 기억이 안 돌아왔잖아. ……우린 원래 세계에서 사이비 신도들에게 쫓기는 중이었어. 도망치던 중에 차원의 관문을 사용했지만 그대로 우주 미아가 됐고. (몇 번 정도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는지 익숙한 요약이다.)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기 위해서 계속 차원을 넘어… 왔잖아? (기억나지는 않았을까, 괜히 떠보는 어조다.)
安浦杉 萌生:……네?(고개가 절로 기울었다.)진지하게 얘기해주세요, 장난하지 말고요. 중요한 걸 숨기는 건 쿠죠 씨의 안 좋은 버릇이에요.(시선을 맞춘 채 고집스레 두 눈을 깜박인다.)
九条天:기억하지 못하는 쪽이 억울한 거 아니겠어? (혼자 팔짱을 낀다.) 다른 세계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가끔 기억을 잃고 덮어씌워지곤 했는데…….
▶:…우리가? 여전히 쿠죠 텐의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영화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제물과 차원의 관문,
비가 멈추는 것은 주문진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비가 쏟아지던 그 여름도, 맑고 화창한 이 여름도. 모두 우리의 진짜 여름이 아닙니다.
우린 원래 세계를 찾아 한없이 우주를 넘나들었죠. 그 과정 중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고,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여름인데도 선선했던 어느 세계, 잘못된 위치에 떨어져 바다에 빠졌던 우리, 겨울 별자리가 보이던 또 다른 세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본래 빛나야 할 곳을 찾아서, 다음 세계로.
그렇다면 왜, 이번 평행세계에서 쿠죠 텐은… 사라지는 중인 걸까요?
▶:쿠죠 텐의 존재 자체가 없었던 세계 또한 이번이 처음입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九条天:이곳은 확실히 다른 곳들과 달라. 다들 날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사라지는 중이고.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에 작은 탄식이 어린다.)
……야스라기 메바에, 너 역시 날 잊을지도 몰라.
安浦杉 萌生:아, 그러니까…….(말꼬리가 늘어진다. 왜인지 어지러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잠시만요, 다 기억났으니까 다시 얘기해요.(미간을 짚고)이제 잊을 일은 없을 거예요.(여전히 확신은 없었다. 하나 부러 아닌 척 강하게 말했다.)…아무튼, 그럼 차원의 관문은요?
九条天:찾을 수 없었어. 혹시나 싶어서 도서실에도 가 봤지만…… 이곳은 지금까지 지나온 세계와 다른 것 같아. 어쩌면 나는 이미 그 때, 죽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이제서야 다른 사람들이 쿠죠 텐이라는 존재를 잊어가는 걸 보면 말이지.
▶:흐르지 않는 몽글한 구름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면, 우리가 선 곳의 짙은 파랑이 가려집니다.
쿠죠 텐은 천천히 철조망에 기대앉아 당신에게 작은 수첩과 연필을 건넵니다. 당신을 위해 옆자리를 가볍게 쓸어내리는 그 손은, 미약하게 떨리는 그 손은, 쿠죠 텐의 얼굴처럼 흐려지고 형태를 잃고 있습니다.
이건 잊지 않기 위한 기록입니다.
九条天:적어두면 좀 더 기억하기 쉽겠지. 잊어버리지도 않을 거고.
▶:그저 희망 사항일지라도.
九条天:야스라기 씨.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安浦杉 萌生:물론이죠. 그 땐 쿠죠 씨가 정말… 조금 미웠어요.
九条天:널 오해했지. 첫인상이라는 건 바꾸기 힘든 건데 말이야. 게다가 연예계 선배라는 사람이 면박을 줬으니. 미안하게 생각해. (무릎을 모은 채 네 안색을 살핀다.) 어쩌면 기본적인 정보도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써 둬,
쿠죠 텐. 한자는 그렇게 쓰고……. (힐끔, 수첩을 집은 네 연필 끝을 바라본다.)
키는 프로필상 172cm. 나나세 리쿠라는 쌍둥이 동생이 있고 쿠죠 타카마사의 양자로 입양되었음. 또 뭐가 좋을까.
安浦杉 萌生:농담이에요. 그리고 쿠죠 씨를 오해한 건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비긴 걸로 해 둘까요.(네 반응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아야 씨와 트리거 여러분의 이야기도 적어둘까요. 쿠죠 아야라는 여동생이 있음. 야오토메 가쿠, 츠나시 류노스케와 함께하는 3인조 아이돌 그룹 TRIGGER 소속.
이런 기본적인 것 말고는…… 좋아하는 거라던가. 쿠죠 씨, 도넛 좋아하셨죠. (제법 집중하고 있는지 질문하면서도 눈길은 여전히 수첩을 향해 있었다.)
九条天:……응, 좋아해. (자신에 대해 하나씩 써내려가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끈에 시선이 닿는다.) 너랑 있었던 일도 좀 써둘까. 뭐, 일 얘기가 태반이겠지만.
安浦杉 萌生:…최대한 아닌 걸로 적어볼게요. 그럼 첫 만남부터 시작할까요.(살짝 내려온 옆머리를 쓸어넘기고 다시 연필을 움직인다. 서로를 오해했던 것, 조금 뻗댔던 것. …물론 제 쪽에서.)
또 뭐가 있죠,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셨던 일, 새해에 우연히 만나 함께 오미쿠지를 뽑았던 일, 그리고….(차례차례 있었던 일들을 적어내린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결국엔 너를 잊어버리게 될까. 여기 적힌 글 몇 문단으로 너를 재단하게 될까, 과거 어떤 이들이 네게 그랬던 것처럼. 야스라기 메바에는 그게 지독히도 싫었다. 손이 멈춘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는 그런 실없는 생각에 잠겼다.)
九条天:봄에 함께 벚꽃을 본 일, 아이돌리쉬 세븐과 스케쥴이 겹치는 날에는……. (말소리가 멈추고, 네 움직임도 멈추자 팔을 뻗어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이어서 쓰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힘을 받아내는 연필의 궤적은 조금 삐뚤었지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소속, 좋아하는 것, 메바에와의 일화, 우리가 함께했던 추억들. 기억해달라는 말과 함께 어느 정도 정보를 적었을 때 즈음, 쿠죠 텐의 목소리마저 뭉툭해져 알아들을 수 없게 됩니다.
쿠죠 텐은 야스라기 메바에의 어깨 위로 툭, 힘없이 머리를 기대네요.
그 무게마저 낯섭니다. 흐릿해지는 기억을 애써 붙잡아도,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기만 합니다.
九条天:다시 만날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날 잊지 마. ……. 야스라기 메바에, 내 이름을 불러줘.
安浦杉 萌生:잊지 않을 거라니까요,(그리 말하면서도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 눌러가며 반복해서 네 이름을 부른다. 뇌리에 새기듯이,)쿠죠 씨, 텐, 쿠죠 텐…….(포갠 손을 단단히 맞잡는다. 그 감촉을 기억하려는 듯이.)
▶:계속, 다시. 불안하게 떨리는 그 목소리. 쿠죠 텐은 자신의 이름을 한참 동안 불러달라고 속삭입니다.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들었을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당신밖에 없어요.
九条天:……내 마지막 팬이 되어줘.
▶:그 이름 역시 떠올리기 힘들어질 때면, 쿠죠 텐는 천천히 눈을 감습니다. 흰 물감을 군데군데 풀어둔 하늘 아래,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지워집니다. 기대어 느껴지던 무게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쿠죠 텐, 쿠죠 텐, 쿠죠 텐…. 우린 차원을 넘기 전, 집으로 돌아가길 빌며 속삭이곤 했죠. 이렇게, 지금처럼.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그를 오롯이 기억하는 건 당신뿐입니다. 도서실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安浦杉 萌生:(도서실로 발을 옮긴다. 걸음은 점차 빨라져 종래에는 반쯤 질주하는 꼴이 되었다. 깔끔히 정리한 머리가 흐트러진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괜히 발걸음이 빨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은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속은 이 계절을 완전히 받아내지 못합니다.
그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웃었던가요? 이 평화로운 세계를 떠날 정도로, 그 아이는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요?
구겨진 수첩에는 옅은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도서실에 도착하면 종교, 예술, 언어가 적힌 책장들이 빼곡합니다. 사서 선생님께선 보이지 않네요.
安浦杉 萌生:(홀로 남는 게 두려웠다. 항상 그랬다. 그게 두려워 언니를 이용했고, 사랑이란 명목으로 멋대로 하려 들었다. 그럼에도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제가 사랑했던 건 늘 그랬다.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필연적으로 제 곁을 떠난다. 언니도, …아이돌리쉬 세븐도.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붙잡아놓기라도 하려는 듯 수첩을 세게 잡고, 종교 책장으로 향한다. 기실 의미 없는 행위였으나….)
▶:실마리를 찾아 도서실을 살펴보던 중, 메바에는 800번대 문학 책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安浦杉 萌生:(살펴본다.)
▶:쪽지에 적힌 창구 번호, 840.01이12꽃.
그것은 <꽃갈피>란 제목의 얇은 영문 시집이었습니다.
꽃으로 책갈피를 만드는 방법과 짧은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꽃을 여러 번 말려야 한다고 하네요. 우리의 여름을 닮았습니다. 수없이 반복한 탓에, 심장에 꽂을 수 있을 정도로 얇게 마른 우리의 몇 십 번째 여름. 책에는 쪽지 한 장이 끼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거짓된 세계라고 하여도, 한 사람만이 사라진 이곳은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굳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하나요? 우린 다시 우주 미아가 되고 말 텐데, 기약 없이 차원의 관문을 다시 넘나들어야 할까요? 야스라기 메바에, 당신에게 쿠죠 텐은 그럴 가치가,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요?
安浦杉 萌生:당신은 항상 그렇게….(표면적으로는 매니저와 라이벌 그룹의 아이돌이라는 비즈니스적인 사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서로를 일정 부분 이해했으며, 끝내는 종착점을 모를 여정마저도 마저도 함께한 나름의 막역한 사이라고. 야스라기 메바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 또한 그리 생각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너의 선택을 이해한다. 너는, 우리는 항상 그랬으니까. 저 역시 기회가 왔다면 비슷한 행동을 했겠지. 그럼에도 끊임없이 스멀스멀 엉겨붙는 이 이유 모를 감정들은…. 야스라기 메바에는 왜인지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동시에 입에선 답잖은 거친 소리가 터져나온다.)……쿠죠 텐!
▶:당신은 그 이름을 부릅니다. 거짓된 여름을 부숴요. 남을 기억하고, 형상화할 수 있는 최고의 단어를. 쿠죠 텐을 오롯이 기억하는 당신의 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