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거대하고 둥글며,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졌다 돌연 툭 튀어나오는 부분을 가진 선체 디자인 덕분에 으레 ‘고래’라고 불리곤 하는 우주선 테미스 3호는 안정적인 궤도를 유지하며 화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21세기로 접어들고 근 오륙십 년간, 유사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문명을 발전시킨 인류의 또다른 걸작이 어엿한 성공 가도 위에 오른 것입니다.
새로운 임무를 위해 탑승한 야스라기 메바에 역시 자랑스러운 테미스 3호의 승무원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출항의 목적은 DSGⅡ(화성 국제우주정거장) 물자 보급 및 단기 체류. 승무원들은 이제 3일 후면 화성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는 중입니다.
순조로운 여행이 이어지는 중이네요.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잠시 잠든 야스라기 메바에는 오랜만에 누군가의 꿈을 꾸고 잠에서 깹니다.
당장 어떻게 해야 된다고 말해줄 건 없지만, 살다 보면 타이밍이라는 게 찾아오는 법이거든. 네가 날 구해줄 날이 오겠지. 144번이나 널 만나며 깨달은 게 있어.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
비온 뒤 안개처럼 어슴푸레한 세상에 조용히 되감기는 목소리는 오래전의 경험을 반추합니다.
자신을 시간여행자이자 당신의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상하면서도 마음 아린 사건을 겪은 후 한참이 흘렀습니다. 그가 당신 안에서 점점 공간을 좀먹고 다른 상상을 밀어내며 자리 잡는 동안 야스라기 메바에는 어땠나요?
그 시계에 대해 잊어버린 순간도 있었을까요, 아니면 한 순간도 그때를 되새기지 않는 시기가 없이 자랐을까요?
문득 생각은 늘 지니고 다니던 회중시계에 미칩니다.
내부가 망가지긴 했지만 습관적으로 관리해 주곤 했었죠. 떠오른 김에 오랜만에 꺼내어 태엽이라도 감아 줄까요?
거대한 향유고래가 별들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기억은 때때로 자신을 좀먹는다. 잊을 즈음 불현듯 생각나 사고를 어지럽히는⋯⋯ 이제는 목소리조차도 희미하게 기억나는 미래의 시간여행자, 그리고 어느 여름의 비일상. 잠시 추억에 잠긴 채 태엽 감는다.)
조심스럽게 태엽을 감아 준 순간, 시야가 아찔하게 훅 꺼집니다. 잠깐 의식을 잃었다고 판단될 정도로 눈앞이 깊게 깜빡였었습니다.
기준치: | 60/30/12 |
굴림: | 5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야스라기 메바에가 잠들었던 곳은 우주선 선내 승무원 휴게실. 2층 침대가 줄지어 놓여 있는 곳이라 주변에 잠들어 있던 동료가 꽤 여럿이었는데요.
지금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건 아니라는 느낌이 명확히 듭니다.
어떻게 된 일이죠?
다시 눈을 뜬 야스라기 메바에는 당황스러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최근 밤샘이 잦긴 했다. 모르는 새 잠들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잠깐, 설마 정말 아무도 없겠어요?
긴 원통형 모양인 우주선 특성상, 야스라기 메바에가 서 있는 휴게실 밖 복도는 내부 끄트머리입니다. 여기서 여가 공간, 화물실, 연구소를 거쳐 조종실까지 갈 수 있습니다. 우선 조종석까지 쭉 훑어볼까요?
승무원 휴게실을 나와 복도를 확인해도, 인적이 없는 건 동일합니다. 지나치게 적막하고 고요한 실내. 복도에도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가 공간으로 향한다.)
이곳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승무원들이 휴식 시간에 지구에서 가져온 영화를 보거나 간단한 운동을 하고, 간식을 먹는 등의 일에 주로 쓰던 공간입니다.
(고개 기울인다. 여기도 없다면 그럼⋯ 연구소에 모여 있으려나.)
승무원들이 우주 항해 중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며 지구로부터 가져온 임무를 수행하는 업무공간이죠.
보통은 이곳에 사람이 가장 많은데요…….
대체 뭐죠?
여기도
아무도
없습니다!
원통형 복도이기 때문에, 화물실을 거쳐 연구소에 갈 수 있겠지만…. 연구소로 가려는 중의 화물실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었으니…. 연구소로 가는 문을 엽니다.
⋯⋯? (제 볼 꼬집어본다.)
아픕니다.
⋯⋯⋯⋯? (꿈은 아닌데. 의아한 낯으로 주변 살피며 화물실로 향한다.)
식량, 비상 연료, 비상약품 등 다양한 물건을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입니다.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습니다!
연구소에 가기 위해 빨리 스쳐지나간 화물실을 재차 확인합니다.
(그제야 빠르게 사고 되돌린다. 꿈도 무엇도 아니라면 전대미문의 대사건. 그런 최악의 상황은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마지막 희망을 품고 조종실로 향한다.)
그리고 역시… 이곳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요즘에야 자동 운항 설정이 어느 정도 받쳐 준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조종실까지 아무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설마, 지금… 이 큰 테미스 3호에 야스라기 메바에 혼자뿐인 건가요?
일단 우주선이 제대로 항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계기 패널이라도 살펴봅시다.
넓은 조종실입니다. 예전 같으면 사람 두어 명만 겨우 들어갈 공간이었겠지만, 기술이 발전되면서 옛 SF 영화들이 상상하던 대로 거대한 유리창과 수많은 계기판이 반짝이는 기관으로 변한 곳이지요.
(몰려오는 두통에 이마 짚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우선 항로부터 확인하고 본부에 연락해 상황 설명 후 다시 지구로⋯⋯ 아무튼 그런 잡다한 생각들로 머리 가득 채운 채 계기 패널 살핀다.)
기준치: | 50/25/10 |
굴림: | 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평소대로라면 여러 알림 사항이 떠 있어야 할 각종 스위치나 패널도 지금은 조용합니다. 하다못해 에러 메시지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거 위급상황 아닌가요? 지구 측 관제소와 소통이라도 해봐야겠습니다. 어디, 조종석에는 지구 관제소와 통신할 수 있는 장치가…. 작동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조종간은 이상할 정도로 힘없이 우쭐거리고, 위치를 표시하는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빠르게 통신 장치 들어 관제소와 연결한다.)
쉽게 연결되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지 않나요?
장치 주파수를 조작하면 지직거리는 화이트노이즈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합니다.
(재연결해본다.)
그리고 파작파작 오가던 화이트노이즈 사이로 어떤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를 만나러 와.
눈꺼풀을 뚫고 아프게 들어오는 빛을 간신히 가리고 몇 초 후, 다시 정상적인 조도가 돌아온 듯합니다.
눈을 떠 보면…… 바깥으로부터 주먹만 한 빛 덩어리 같은 것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전면 창문 너머에 있던 그것은 놀랍게도 창문을 그대로 통과하여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작은 심장처럼 팔딱팔딱 맥동하는 움직임으로 야스라기 메바에에게까지 다가왔습니다.
창백한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은 일반적 상식과 달리 몹시 차갑고 얼음처럼 어슴푸레한 명도를 지녔습니다.
변을 잠시 맴돌던 빛 덩어리는 이윽고 야스라기 메바에의 시야 근처에 떠서 가만히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들어라.』
순간 야스라기 메바에의 온몸에 강제적인 소름이 돋습니다.
그것은 도무지 인간의 언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음성이었습니다.
야스라기 메바에의 안에서부터, 우주선 바깥에서부터, 지구로부터, 어쩌면 퀘이사 너머의 또 다른 태양에서부터, 온 세상에서,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서 터진 외침이었습니다.
공중을 징징 울렸고, 그다지 우렁차진 못했지만 놓치기가 불가능할 만큼 명징하였으며, 비통한 슬픔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적막한 환희처럼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불어도 아닌 문장으로 하여금 목소리는 말했습니다.
『들어라, 너는 태초의 것이 이끄는 대로 따르라.』『저것이 너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주파수를 돌리는 버튼이 딱 맞물리는 듯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집니다.
그 순간 조종석 전체의 불이 꺼집니다. 동시에 창문 바깥이 번쩍였습니다. 눈이 뜨거울 정도로 환하게 말입니다.
기준치: | 60/30/12 |
굴림: | 61 |
판정결과: | 실패 |
1d3
만큼 이성치 차감합니다.『빛이 있으라.』
그러자 야스라기 메바에의 눈앞에서 맥동하던 빛 덩어리가 휙 저편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열 발짝쯤 거리에서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몸을 흔듭니다.
저쪽으로 가면, 승무원 주거 공간이던가요?
그리고 그 신의 음성 같은 자연의 으름장은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잠시 망설이나 결국 뒤따른다.)
뒤따라 일직선상의 우주선을 걸어가니, 닫아 둔 문을 휙 통과해 먼저 휴게실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들어가 볼까요?
(걸음 빨리해 뒤 좇으며 휴게실로 조심스레 들어간다.)
야스라기 메바에가 누워 있던 침대에 누가 있네요? 빛 역시 그 침대 주변에 가만히 떠 있습니다.
야스라기 메바에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섭니다.
(다가간다.)
당신은 이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죠, 오늘도 생각했었으니까요.
창백하고 조용한 살결과 둥근 어깨, 반짝이는 속눈썹은 눈꺼풀 너머의 생명을 가린 채 닫혀 있습니다.
똑바로 누워 잠든 그는 가슴팍을 고르게 오르내리며 소동물과도 같이 호흡합니다. 깨지 않는 꿈을 꾸는 듯이.
상아처럼 빛나는 살갗, 금관 하나 걸치지 않았으나 도리어 경건해 보이는 그는 마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에서 갓 건져 올린 최초의 인류, 어쩌면 천사같습니다.
이 사람이…… 어째서 여기 있죠?
이때 야스라기 메바에를 이끈 빛이 훅 고도를 낮추더니 그의 가슴을 통과해 사라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체처럼 싸늘한 쿠죠 텐은 눈을 뜨지 않네요.
다가가니, 아.
⋯⋯쿠죠 씨? (작게 불러본다.)
변화가 없습니다.
(조심스레 흔들어본다.)
차가운 체온이 손끝에 닿을 뿐입니다. 쿠죠 텐은 말이 없고, 흔들어 본다 한들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통 이럴 때 동화에서는 어떻게 하던가요?
⋯⋯⋯⋯하임리히?
동화책이 맞긴 한가요?
애초에 자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부끄러운 짓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어쩌면, 파렴치한 그 남자에게 복수할 기회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침묵한다.)
⋯⋯어쨌든 쿠죠 씨가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필요를 위한 응급처치입니다. (복수라던가, 그런 사적인 감정은 전혀 담지 않을 거니까요. 말하고서도 한참 망설인다. 그리고 머리칼 한쪽으로 넘기고 마침내, 고개 숙여 조심스레 입맞춘다.)
야스라기 메바에는 결심을 마치고 쿠죠 텐에게 약속의 입맞춤을 보냅니다.
그리고 입술끼리 맞닿은 순간에, 야스라기 메바에가 호흡을 불어넣자, 아주 느리게, 서서히 달궈지는 금속처럼, 쿠죠 텐이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속눈썹의 개수도 셀 수 있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는 생동감 하나 없이, 줄이 끊긴 인형처럼 멍하니 야스라기 메바에를 봅니다. 생명이라면 무릇 지녀야 할 어떤 불씨가 꺼져 버린 무존재 같습니다.
(자신의 앞에 있는 당신을 응망하더니, 무정문을 관찰하듯 흘려 지나간다. 넋이 없는 눈꺼풀 가벼이 깜빡이더니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침대에 내려와 우뚝 선다. 멀거니 주변을 둘러보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느리게 걸어 향하는 곳… 휴게실 밖으로다.)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걷는 쿠죠 텐은 아주 천천히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우주선 구조를 따라 나아갑니다. 어떡하죠? 일단 뭘 하는지 두고 볼까요?
쿠죠 씨⋯? 잠시만요! (따라 걸음 옮기며 쉴새없이 질문 퍼붓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왜 여기 있느냐, 전부 당신이 한 거냐 따위의⋯)
(당신의 말 들리지 않는지, 들리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그 무엇 하나 알 수 없는 상태로 여가 공간
에 들어선다. 그 안을 살피지만, 무언가를 찾거나 명확히 바라보기보다는 그저 고개가 돌아가니 시선도 돌아가는 듯한….)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보이지 않는 집게 같은 것이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듯이 그 자리에 고정되어 멈춘 채입니다. 내부를 구성하는 가구나 기계들도 기묘하게 색이 다릅니다. 기묘하게 환상적인 공간입니다.
눈에 띄는 물건으로는 창문, 책장, 스크린, 화이트보드, 수납함이 있습니다.
한편 야스라기 메바에는 내부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주선이야 당연히 원래 무중력 공간이니 물건들이 둥둥 떠다니는 게 정상인데, 벽에 올려 둔 물건들이 평소처럼 떠다니지 않습니다.
이건⋯⋯. (무기질한 반응에 말 멈추고 행동 관찰하던 것도 잠시, 주위의 변화에 눈 크게 뜨고 결국 네 모습 시선 한켠에 둔 채 창문 살핀다.)
바깥이 희붐하게 밝아옵니다.
동이 트는 시점의 낙조처럼 저편에서 흰 불빛이 번쩍였다 사라집니다.
높은 고도에서 박살 나 부서지는 유리알과 같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짧은 찰나로만 서쪽을 불사르고 꺼진 그 불빛은 인간이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할 천문학적 규모의 폭발로 보입니다.
다른 물건을 볼까요?
거대하고 너른 창문입니다. 아름다운 우주가 보입니다.
⋯⋯ (책장 살핀다.)
유령처럼 걷던 그는 원래대로라면 승무원들이 취미 용품을 넣어 두던 책장 앞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메바에가 알던 물건들이 하나도 없는 빈 책장 한가운데에 책만이 한 권 꽂혀 있었습니다. 쿠죠 텐이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 보려 하지만 그의 손은 책을 그대로 통과합니다. 벽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야스라기 메바에보다 먼저 쿠죠 텐이 앞서 책장에 다가갑니다.
이걸 찾으시는 건가요? (가만 바라보다 책 꺼내 표지 살핀다.)
이 책… 어딘가 익숙한데요. 표지에는 <세계야담집>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분명 본 기억이 있는 책 아닌가요?
기준치: | 90/45/18 |
굴림: | 95 |
판정결과: | 실패 |
건네주기 전에 한 번 펼쳐나 볼까요?
(⋯⋯펼쳐본다.)
흐름은 대강 기억하던 것과 같은데, 명확한 문장이 쓰여 있다기보단 메바에의 얼버무린 기억을 받아적은 듯이 흐리멍텅한 내용입니다.
그래도 그가 원하는 것 같으니, 건네 줄까요….
책은 이상하게도 앞뒤가 텅 비었고, 야스라기 메바에가 예전에 서점에서 읽어 보았던 <분홍 눈의 남자> 챕터만 채워진 채입니다.
(눈 가늘게 뜨고 한참 살피다 책 덮어 네게 건넨다.)
메바에가 쿠죠 텐에게 책을 건네자, 아까와는 달리 쿠죠 텐의 손에도 책이 만져집니다!
(책 쥐고 느리게 눈만 깜빡이다, 순간 깊게 "아…"하고, 짧은 감탄사로 첫 성음을 뱉어낸다.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은 그대로지만, 시선은 그녀를 향한 채다.) …….
다른 파트 조사가 가능합니다.
(의문 가득 찬 눈으로 시선 마주하고 바라보다 고개 돌려 스크린 살핀다.)
다른 곳도 둘러볼까요?
평소 영화 따위를 보거나, 자료화면을 띄워 놓고 회의할 때 쓰던 스크린 TV입니다. 지금은 틀어봐도 화이트노이즈밖에 나오지 않네요.
(화이트보드 살핀다.)
원래 승무원들끼리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항을 메모해 두던 것입니다. 지금은 텅 비어 있네요. 이걸 누가 지웠던가요?
(이걸 지운 기억은 없는데. 다른 누가 지울 리도 없고⋯⋯ 보드 표면 살피다 수납함 쪽으로 걸음 옮긴다.)
텅 비었습니다.
(손 들어 조종실 쪽 방향 가리키더니, 무어라 중얼거린다.)
기준치: | 80/40/16 |
굴림: | 93 |
판정결과: | 실패 |
이리로 ….
이곳 내부도 마찬가지로 야스라기 메바에가 알던 것과는 모양이 묘하게 다르네요. 벽면 시계, 선반, 서류함 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쿠죠 텐은 다시 앞서 걷습니다. 이번에는 연구소입니다.
(따라 들어서 벽면 시계부터 살핀다.)
역시 둥둥 떠다니지 않는 물건들이라거나, 지금의 상황. 조금 이상하네요.
아날로그 시계는 2시 4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잠깐, 여기 있던 시계는 디지털 아니었던가요?
(눈매가 배로 삐죽해져서는 선반 살핀다.)
각종 시약이나 우주에서 연구/실험하는 내용과 관련 있는 플라스크를 두는 곳인데, 지금은 텅 비었네요.
(멍하니 있는 것 흘금 넘겨다보곤 서류함 살핀다.)
원래 연구기록 등을 적어 넣던 서류함입니다. 지금은 텅 비었네요. 아니, 자세히 보니 뭔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냅니다. 소리를 듣자마자 쿠죠 텐이 고개를 듭니다. 이번엔 또 뭘까요? 안을 살펴봅시다.
(살펴본다.)
안에 든 건 오르골 상자입니다. 그걸 본 쿠죠 텐은, 쓰임을 안다는 듯 음자리표가 그려진 태엽을 돌리려는 행동을 취하지만, 여전히 그의 힘은 물체에 닿지 않고 정사각형의 물체를 통과합니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작게 한숨 내쉬고 태엽 돌린다.)
도르륵,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당신만을 바라보는 그에게 건네 볼까요?
(반쯤 확신 없는 눈. 그러면서도 조심스레 건네본다.)
쿠죠 텐이 그것을 쥐면 불이 꺼진 듯이 냉막하던 눈동자 너머에 비로소 ‘이 사람이 살아 있구나’ 싶은 생기가 약간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야스라기 메바에가 물건을 건네 주자, 손끝에 닿은 체온이 아주 살짝 따뜻해진 것 같다는 감각이 느껴집니다.
야스라기…. (당신을 알아본다는 듯, 이채가 스친 눈이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춥다는 말과 함께 당신을 끌어안는다. 온기를 찾는 짐승처럼, 쇄골에 고개를 묻고…….) 메바에.
(기운 없는 손으로 조종석 방향 가리킨다. 가야 한다는 듯.)
그렇다면 중간에 화물실을 지나야 하네요.
자, 잠깐⋯! (눈동자 너머 생기 돌아온 것 보고 기쁜 듯한 미소 띄운 것도 잠시, 갑작스런 포옹에⋯)
⋯⋯저기, 일단 놔 주셔야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나 그런 것치고 점점 줄어드는 볼륨.)
(당신의 의견에 들어올려진 고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어린아이의 빛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 번 물러나서 함께 화물실로 발걸음 옮긴다.)
쿠죠 텐, 메바에의 옆에서 끊임없이 추워, 추워… 중얼거리며 몸을 움츠린 채입니다.
(눈 가늘게 뜬다.) ⋯⋯아무튼 안는 건 안 돼요.(제 겉옷 벗어 둘러주고는 성큼 앞질러 화물실로 향한다.)
(온기 서린 옷 덮은 채로 눈을 깜빡이며 따라간다.)
벽장
, 식품 보관장
, 응급함
, 선반
등이 눈에 띕니다. 이곳 역시 앞선 장소와 마찬가지로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벽장 살핀다.)
낡은 라디오가 하나 있습니다. 누가 사용했던 걸까요? 조작이 될 것 같은데.
아⋯⋯(조작해본다.)
기준치: | 80/40/16 |
굴림: | 6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의 목소리네요.
다른 곳을 둘러볼 수 있겠습니다.
말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나를 만나러 와.>
(식품 보관장 살핀다.)
달콤해 보이는 도넛이 놓여 있습니다……. 먹어도 좋습니다.
⋯⋯뭘 먹을 기분은 아니라서요. (도로 내려놓고 응급함 살핀다.)
응급약품을 보관하는 상자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반 열어본다.)
쿠죠 텐은 그것을 쥐고 싶은지… 관통하는 손을 뻗고 있네요.
발레에 사용하는 토슈즈입니다. 이게 어째서? 사이즈도, 촉감도 분명 당신이 아는 것입니다. 아니,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요.
⋯⋯ (집어들어 네게 건네본다.)
쿠죠 텐이 발레슈즈를 쥔 순간, 다시금 길게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엔 이제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왔습니다. 전보다도 명료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혼란에 휩싸입니다.
저, 야스라기 메바에? 뭐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들고 있던 토슈즈와 당신을 번갈아보고, 주변을 살피고…. 당신에게 답을 요구한다.)
그는 깊이 잠들었다 벼락같이 깬 사람처럼 어리둥절해 보입니다.
⋯⋯하? (침묵.)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당신 뭔가요? 왜 여기 있어요? 선내 사람들은 왜 전부 사라져 버린 거죠? 전부 당신이 얽힌 일인가요? 몸은 괜찮은 것 맞아요? (따위의 방금 전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뭐야. 갑자기 그렇게 우다다? 야스라기 씨가 아니라 기관총이야? (그러던 중 제 어깨에 올라간 당신의 외투 발견하고, 고개 기울여 향 한 번 맡았다. 이후에는 안정된다는 듯….) 나야 막 일어났으니 잘 모르겠는데. 지금이 몇 년도인지도. 장소도…. 여긴 우주선 안이지? 네 동승자도 있었던 모양이네. 조금 더 상세히 말해 봐. 일단 진정 좀 하고….
(못마땅한 듯 눈 가늘게 떴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히 말 잇는다.) 여긴 우주선 안이에요. 쿠죠 씨가 떠난 뒤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시점이고요. 동료들과 함께 화성으로 향하던 차였는데 돌연 전부 사라지고 우주선 안에 남아있는 생명체라곤 당신뿐이더군요. (침묵.) 아무튼⋯ 요컨대 저희 두 사람이 이 우주선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이야기예요. (쿠죠 씨를 한 사람이라고 쳐야 할지는 잘모르겠지만⋯⋯ 작게 덧붙인다.)
있죠, 쿠죠 씨. 옆에 있는 도넛을 한번 잡아보시겠어요?
뭐야? 그 못 믿는다는 눈빛은. (가만히 당신 이야기를 들으며 골몰하다가, 당신이 말한 도넛 집는다. 집어 들고, 그런 요구를 한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이 의아한 눈빛.) 왜? 유통기한은 괜찮은 걸까. 이 도넛. 흠, 도넛 말고도 다른 것들이 떠다니는 채로 멈췄나…. 시간이 멈춘 것 같네. 네 말처럼 이 우주선의 유일한 생존자 둘을 두고. 특이한 점은 없었어?
다행이네요. 방금 전에는 말도 전혀 안 통하고 그대로 투과해 물건도 제대로 집지 못하셔서 제가 환각이라도 보는 줄 알았거든요. (짧은 고민.) 특별한 거라면 당신이 의식이 없을 때 계속 조종석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점이려나요. 보아하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이것 관련해서 짚히는 건 없으신가요?
이상한데. 뭐, 확실히 이 공간이 정상적인 시간선은 아닌 것 같고. 너는 모르겠지만 떠도는 물건 중 절반 정도는 내가 아는 물건들이야. 그러니까, 과거의 너와 얽힌…. 나,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애당초 너를 마주 보고 있다는 거 자체가 안 믿기니까. 나는 옥상에서 너와 헤어지기까지가 기억하는 일의 전부라고.
뭐,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만요. 먼 우주에서 당신과 만나고, ⋯⋯로 깨워서⋯.
(작게 헛기침한다. 이어지는 말의 속도가 미묘하게 빠르다.) 아무튼, 재회의 기쁨은 차치하고 우선 이 일부터 해결해야겠네요. 이번 항해는 제가 맡은 일이고, 사라진 사람들 역시 소중한 제 동료들이에요. 게다가 이 상황에서 사냥개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넘겨다본다.) 몸은⋯ 말씀하시는 걸 보니 멀쩡한 것 같네요. 이제 춥지 않으시죠? (퍽 걱정 가득한 낯이나⋯)
아니. 몸은 좀 추운데. 추측하기로는 여기가 우리 둘 중 누군가의 무의식과 깊게 연관된 가상 우주가 아닐까 싶어. 내가 처음으로 시간 여행을 했을 때도 이런 공간을 지나왔던 것 같거든. 조종실, 갈까…. (부러 네 외투 더욱 단단히 여민다.)
뺏을 생각은 없었거든요. (미묘한 표정⋯) 뭐,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요. 일단 확신이 필요하니 조종실로 가 더 찾아보는 편이 좋겠네요. (앞서 걸음 옮긴다.) 이쪽이에요.
화물실에서 이어지는 구역은 다음 구역은 원래 조종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목격한 공간은 전혀 딴판인 장소였습니다.
마치 전시실 같은 풍경입니다. 깨끗하고 넓은 홀 안에 밝은 조명과 유리 진열장이 가득합니다.
쿠죠 텐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주변을 둘러봅니다. 그러더니, 무언가 퍼뜩 떠오른 듯이 야스라기 메바에의 손을 잡은 채 성큼성큼 맞은편 유리벽으로 걸어갔습니다.
한쪽 벽면을 완전히 채운 유리 너머에 무엇인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쿠죠 텐의 시선이 그곳으로 고정됩니다. 먹먹한 침묵에 사로잡힌 그는 잡은 손을 놓고 유리 위로 쓰다듬듯이 선을 그려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공원에서 받아 보았던 야스라기 메바에의 초상화입니다.
야스라기 메바에가 기억하고 또 잘 관리해 왔을 것과 달리 누렇게 변색되어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잘 압축하여 보존한 형태입니다. 아마도 이건… 쿠죠 텐이 가장 처음 보고 마음을 빼앗겼던 미래의 그림이겠지요.
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아우르는 유산 앞에 당신은 어떤가요, 메바에?
이 그림, 정말 소중히 보관했거든요. (나란히 서서 바라본다. 희미하게 미소 띄운 채로⋯⋯) 있죠, 쿠죠 씨. 제 메세지는 제대로 전해졌나요?
그림을 쓰다듬는 것보다도, 지금은 눈앞의 실물을 만질 수 있으니까…. (눈을 한 번 감고는, 곧 시선 돌려 당신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팔을 뻗어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당신의 손을 천천히 맞잡는다. 금일 침대 위에서 재회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온도로, 인간의 온기가 당신 손바닥 안에서 퍼지고… 그리고 손가락을 파고들어 깍지를 끼기까지.) …싫으면 말해.
저, 당신이 정말 많이 궁금해졌거든요.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작게 움찔하나 곧 파고든 손 단단히 맞잡는다. 당연히 싫다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러니까 알려주세요, 당신에 대한 것 전부를⋯ 쿠죠 씨가 직접요.
인간의 가장 훌륭한 점은 호기심이 가득하고, 상상력의 동물이라는 거겠지. 지금의 너는 야스라기 메바에지만…. 143번째의 만남까지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지금만큼이나 빛났던 또 다른 야스라기 메바에였는데…. 아이돌 그룹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었어. 내가 담당은 아니었지만. (안 믿기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장난스레 웃으며 손아귀에 조금 더 힘을 가한다.)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지. 사람은 상황과 환경마다 바뀌는 생물이니까, 나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했었으니까. 네가…. (아득한 과거를 그리며, 낯을 마주해 자유로운 손이, 손가락 마디가 당신의 턱에 정착한다. 유려한 곡선을 덧그리며.) 그런 와중에도 지금까지 오게 한 건, 초상화 속의 너를 보기 위해서였어. 언젠가 만날 미래의 너를 위해서. 매일을 기대하며 살아왔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너를, 그리고 이 그림을 마주했던 그 순간에는….
나에 대한 것을 알고 싶은 거라면… 소개는 단순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지. (얼굴, 당신과 가까워지며 진홍빛 눈동자가 그녀를 또렷하게 직시했다.) 야스라기 메바에를 사랑하는 남자. 그게 쿠죠 텐이라는 사람이야.
(한때는 그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한 사람만을 좇고 종내에는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도 희생한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어서 더욱 그에게 다가가려 노력했고, 그럼에도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쿠죠 텐은 그렇게 불가해한 채로 박제되어 메바에의 곁에 미련으로서 함께했다. ㅡ잠시 옛 추억을 곱씹은 메바에는 생각했다. 어째선지 그와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그를 조금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깨닫는다. 제가 쿠죠 텐에게 가지고 있는 이 감정은 분명⋯)
⋯⋯역시 파렴치해요.
(더 파렴치한 일을 해도 되나, 마주한 여인을 바라보는 정애 섞인 눈동자가 깊어져 갈 즈음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발명한 도구로 네게 물었다.) 키스해도 돼?
⋯⋯⋯⋯네?
싫어?
(네 뺨 움켜쥐고, 더욱이 얼굴 가까워져서… 피부에 느껴지는 건 호흡, 그리고 속눈썹 내리깐 사내의 눈동자, 덧붙여 당신을 향하는 올곧은 시선. 고개 조금만 더 기울이면 맞닿을 것 같다.) 나는 하고 싶은데.
(호흡 맞닿을 즈음의 거리에 가닿자 반사적으로 눈꺼풀 움찔한다. 눈길 제게 향하는 것 흘리고는 시선 바닥에 떨군 채로⋯) 싫다고는 안 했어요. 그저⋯⋯
온 우주가 한 사람 안에 있으니 결국 그가 곧 자신의 세계였다. 손안에서 찰랑이는 찬란을 마신다. 떨리는 입술로. 온통 반짝인다. 눈을 감아도 잔상이 어둠 안에서 춤을 춘다. 떠보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폭포처럼 공중을 달리는 불빛뿐.
화려한 밤이다.
은하를 퍼 올려 흩뿌린 것 같다. 어린 옛날의 사람들이란 모두 이처럼 별이 비산하는 가운데 갈라진 조각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맞닿은 살갗이 이처럼 뜨거울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뜨거운 것은 그 자신의 체온일지도 모르겠다.
목격한 어떤 우주의 극채색보다 빛나는 광경이 여기 있다. 경이로운 기술로도 다 재현해내지 못할 맥박, 이 맥박을 보라. 실재하는 것은 맞을까. 대화로써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살았을까. 이토록 아름다운 과거에도 역사와 고통이 있고 영양을 섭취한 순간이 존재하며 때론 넘어져 다친 경험이 있었을까.
사람이라면 이렇게 눈부실 수가 없는데.
혹은 사랑이 아니고서야.
그리하여 시간여행자는 마침내 폭발하는 별빛을 움켜잡았다.
야스라기 메바에, 야스라기 메바에….
떨리는 목소리로 두 번 반복해 불렀다. 그는 치열한 환호에 잠겨 있다. 수십 만일을 건너서 돌아온 지금의 행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해 주는 순간에 있다. 벅찬 떨림 속에서 꼭 같게도 겨울의 달을 닮은 눈을 들여다본다. 내가 미쳤다고 말해도 좋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런 체념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지금의 기분을 다 설명할 수 없어서, 그냥 계속해서 불렀다.
호명과 호명 사이 틈이 생길 때마다 턱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우리는 결국 똑같이 돌아 버렸고 내게는 네가 도덕률이니까…….
멈춘 시간 속에서 진득한 타액 소리가 들렸던가요. 달뜬 호흡 놓치기 싫어 억지를 부리던 쿠죠 텐의 입술도, 야스라기 메바에의 어깨를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하던 손도, 떨어지지만…… 혀를 섞었다는 것을 명증하듯, 둘 사이의 은사가 주욱 이어지다가 이내 끊어지며 사라집니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려나요? 때마침 반대편에도 문이 있기야 합니다.
정말, 부끄럼도 없이⋯⋯. (상기된 얼굴로 호흡 고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쨍! 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그것은 얼핏 보기에 와인 같습니다. 하지만 병이 투명하고, 안에 든 액체는 찬란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습니다.
메바에가 뒷걸음질을 치면 발에 뭔가 차입니다.
부끄러워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능청스레 고개 기울이다가, 당신 발치에 채인 병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감로주처럼 생겼는데. 왜 여기에 있지? 야스라기 메바에, 네가 가져온 거야?
그거야 당연히⋯⋯! (눈 삐죽하게 뜨고 반론하려다⋯) 아뇨, 저도 처음 보는 병인데… 이것도 무의식과 연관된 물건인 걸까요. (허리 숙여 조심스레 병 집어든다.)
인간의 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여행을 할 때 마시면 몸을 보호해 주는 음료야. 시간 여행을 하거나, 우주로 나가거나. 나도 처음에는 이걸 마셨으니까… 가지고 이동하는 게 어때? 반박할 마땅한 말도 안 떠오르는 것 같은데. (소악마답게 웃고는 조종실로의 문 연다.)
내부는 알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바닥이 조금 이상하네요. 평범한 타일 바닥이 아닙니다. 옻빛 나무 재질인데,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포장을 반쯤 뜯은 시계 같습니다.
문을 열면, 그제야 목적했던 조종실이 보입니다. 멀리 너른 우주가 펼쳐진 망망대해입니다.
물어봐서 먼저 대답한 것뿐이잖아요? ⋯ (그리고 네 걸음 뒤따르며 이어지는 영양가 없는 말들 ㅡ 요약하자면 대략 부끄러워할 이유는 차고 넘치며 당신은 의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내용의⋯)
(네 투덜거림 적당히 흘려 듣는다. 바닥들 찬찬히 바라보더니 가운데 즈음, 작은 톱니 두 개가 맞물려 돌아가지 않고 튀는 것 발견한다.) 어라, 여기….
텐이 가리키는 그 아래에 무언가를 끼워 넣을 수 있는 홈이 하나, 홈 바로 옆에 시곗바늘을 돌리는 태엽이 있습니다.
여기에 시계를 끼워넣어야 하는 걸까요⋯⋯ (흘금 회중시계가 든 주머니 바라본다. 이걸로는 어떻게 안 되려나.)
메바에가 가지고 있는 회중시계와 딱 맞을 것 같은 크기인데요….
그러고 보니 기현상이 시작된 것도 시계의 태엽을 감은 뒤였죠⋯ 이게 무언가의 트리거인 걸까요. (고개 기울이고는 홈에 시계 집어넣어 크기 맞춰본다.)
꼭 들어가지만, 변화는 없습니다. 다른 곳도 확인을 해야 하는 걸까요. 시계가 돌아갈 만한 다른 조건이라면….
계기판, 잘 모르는 상태로 봐도 전기가 끊긴 것 같은데. 조종간에서는 그나마 빛이 나는 걸 보면 바닥부터 해결해야 하는 건가. (주변 두리번거리며 내부 살핀다.)
야스라기 메바에. 뭔가 알겠어?
글쎄요, 일단 한번 살펴봐야겠어요. (네 걸음 따라 내부 눈으로 훑다 우선 태엽부터 돌려본다.)
태엽은 잘 돌아갑니다. 뭔가, 시간을 맞추면 작동할 것도 같은데….
그 시계는 이용자를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는 힘을 가졌다고 해. 야스라기 메바에, 혹시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우주 비행사가 됐다며.
북유럽의 밤바다. 오로라가 보고 싶어요. (양쪽 다 왠지 쿠죠 씨를 닮아서⋯⋯ ) 우주 비행사치곤 소박한 소원이죠.
나쁘지 않네. 네가 정말로 바라는 거라면, 데려가 줄 테니까. 자 그래서, 시간은…. 여기, 시계가 있긴 해?
아까 연구소 쪽에 벽시계가 하나 있었어요. 시간은⋯ 2시 4분이었던가요.
처음에 야스라기 메바에가 보았던, 푸르게 맥동하는 빛이 납니다. 이제 야스라기 메바에는 조종간을 당길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마침내 태엽을 돌려 시간을 맞추면, 달칵 소리와 함께 멈췄던 톱니바퀴들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기준치: | 50/25/10 |
굴림: | 4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사라졌던 빛 덩어리가 나타나 두 사람 앞에서 팔딱팔딱 뛰고 있습니다. 잠시 흔들거리던 그것은 조종석 쪽의 기압실 문 방향으로 사라졌습니다. 저길 열고 나가면… 바깥인데요?
두 사람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기판 앞에 섭니다.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던 테미스 3호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시시각각 별빛이 선체 뒤로 흐릅니다. 3차원도 4차원도 아닌 듯한 어떤 날들을 건너, 찬란한 행성의 바다를 타고 넘어…….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아득한 정신을 차려 보니 테미스 3호는 기이한 공간에 멈춰 섭니다.
⋯⋯하? (황당⋯)
거긴 못 따라가요.
(당신이 들고 있는 병 빤히…….)
따라갈 수 있겠네.
⋯⋯⋯⋯아.
금빛 액체를 마시면 몸속에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술이라기보단 달을 삼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제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가볼 수 있습니다.
빛과 색의 삼원색을 백만 번 겹쳐 쌓고 온갖 조명과 필름을 다 가져와도 지금 이 광경은 묘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뜨거운 항성의 명멸이 감미롭게 뺨에 내려앉고, 기계 장치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잘 짜인 커튼의 모양으로 머리칼을 드리웁니다.
조용한 진동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발과 발 사이 부드럽게 엉기는 무중력이 마치 비단 같습니다. 보석처럼 맺혔다 흘러 떨어지는 위성들, 멀리 반짝이는 은하, 분명 공기조차 없을 우주 저편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과 축복처럼 관능적인 여름밤의 열기. 오렌지처럼 상큼한 순간들이 꿈결로 모여 공간으로 화한 듯이. 두 사람이 그리워하는 시절을 모두 담은 듯이…….
이곳은 어딜까,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문득 시선이 닿는 곳에 유리나 거울, 혹은 물체가 잘 비치는 수면, 이것도 아니라면 액정 스크린 같은 것이 끝없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깨닫고 보면 두 사람은 한 방향으로 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길 오른편으로 스크린이 지평선 너머까지 쭉 이어진 것인데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어떤 액정처럼 화면 안에는 여러 풍경이 있습니다.
따라 걸어가면서 관찰한다면 놀랍게도 몇몇 스크린에는 야스라기 메바에의 유년 시절도 담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 발레를 하는 야스라기 메바에, 교복 차림인 야스라기 메바에, 아주 어린 아기인 야스라기 메바에, 혹은 야스라기 메바에가 모르는 과거의 옷을 입은 쿠죠 텐도 움직입니다. 머리가 짧거나, 길거나, 아주 예전 사람처럼 드레스를 입었거나,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거나…….
두 사람은 유백색 허공으로 나아갑니다. 딱딱하지도 흐르지도 않는 기이한 감촉의 바닥이 밟힙니다.
쿠죠 씨, 이건⋯⋯.
글쎄, 세계에 기록된 기억들인가. 이거, 만져 보면…. (손 뻗어 화면 같은 것을 눌러 보자면, 손이 화면을 통과한다.) 알 수 없는 공간이네.
이때, 무수한 스크린 사이에서 야스라기 메바에는 문득 아주 눈에 익은 광경을 발견합니다.
날씨가 유난히 화창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는 소소한 점을 제외하면 다른 날짜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날입니다.
그날도 야스라기 메바에는 평소처럼 등교했습니다. 그런데 교실로 들어서니 뭔가 이상한 게 보입니다. 원래 자리 배정상 야스라기 메바에의 옆자리는 비어 있는데, 난데없이 책상 하나가 생긴 게 아닌가요?
게다가 누군가 앉아 있습니다. 교복을 입은 야스라기 메바에가 자리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쿠죠 텐 역시 야스라기 메바에의 시선을 좇아 화면을 보고 놀람 섞인 웃음을 터뜨립니다. 이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혹시 기억하나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창문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정말로 사건이 생길 타이밍인데요?
아.
(얼빠진 감탄사 후에) 알 것 같아. 야스라기 메바에. 손, 줘 봐. 빨리. (손바닥 당신 앞에 펴 보이며 시선 마주한다.)
손바닥을요? 갑자기? (따라 얼빠진 낯 되었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주먹 쥐고⋯)
빨리, 라고 말했는데.
⋯⋯쥐어보라는 줄 알았네요. (한층 얼빠진 낯 되어서는 손 내민다.)
(영문 모르겠다는 당신의 손을 쥔 채로, 스크린 너머로 손 뻗는다.)
강하게 맞물려 잡은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퍼집니다.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맥박이 두근두근 흐릅니다. 손끝에 혈관이 지난다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깨달을 줄이야. 두 사람의 손은 매끄럽게 화면을 통과합니다. 물의 장막 같은 것을 지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쿠죠 텐은 야스라기 메바에의 손을 잡은 채 이리저리 더듬고 이끌어 봅니다. 그러다 작고 판판한 유리 같은 것이 손끝에 잡혔을 때… 그것을 힘주어 밀쳤습니다.
이윽고 화면 안에서…….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위쪽 창문이 야스라기 메바에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안 돼, 야스라기 메바에.
144번째는 안 돼.
경악 어린 깨달음이 내달립니다. 쿠죠 텐은 대단한 것을 알게 된 사람처럼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의 널 다치게 할 뻔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닌가.
기억나. 저 날. 네 옆자리, 원래 내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날 아침까지도 널 찾지 못해서 굉장히 초조한 상태였고. 그저 학교를 마구잡이로 뒤져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유리창이 떨어지잖아. 그 아래엔 네가 있고. 이후엔 네 옆에 앉을 학생의 자리와 내 자리를 바꿔치기했지만…. 애매한 시간선이지만, 그렇지, 저곳의 내게 네 좌표를 알려준 거라고. 우리가, 지금.
이제야 여기가 어딘지 알겠네. 「람은 누구나 가장 긴 여행을 떠날 때 자신에게 얽힌 모든 인연과 시간이 동시에 흐르는 어떤 길을 걷게 된다」는 말, 알아?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고차원 공간. 시간축의 의미를 상실한 6차원 우주. 그런 거.
시선 너머에는 지평선을 밝히는 환한 여명이 있습니다. 이 길의 끝까지 걸어다면, 목적지가 있는 걸까요? 북유럽의 밤바다가.
마저 산책할까. ……메이 쨩.
『그게 너의 대답이냐?』
놀란 얼굴을 든 쿠죠 텐은, 이내 웃으면서 야스라기 메바에의 팔을 굳게 잡은 채 심호흡을 하고 명확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때에, 야스라기 메바에가 맨 처음 들었던 바로 그 통렬하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가 하나의 질문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안에서, 세상의 밖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이것이 나의 답.
그리고 야스라기 메바에의 손을 잡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메이 쨩?
(익숙치 않은 호칭에 눈 동그랗게 뜬 것도 잠시, 얽은 손 강하게 맞잡고는 분명한 목소리로 답한다.)
이게 제 답이에요.
둘은 다시 걷기를 재촉합니다.
우리는 절망으로 태어나 얼음에 파묻혀 죽더라도
세상에 이토록 색채가 많은 까닭을 알아서,
증거도 해설도 필요치 아니한 사랑, 시간은 속일 수 없고.
그 밖의 아무 소용없는 나약한 것들은 전부 멎은 우주를
두 사람이 걷고 있습니다.
횡포처럼 당신을 아낀다던 쿠죠 텐. 질식할 것 같은 애정, 익사 당할 듯한 사랑. 그의 이름을 발음하면 종종 침몰하는 듯한 기분에 뛰어들곤 했습니다. 불시착한 우주먼지처럼 이 시간여행자의 말도 안 되는 애정에 휩쓸려 다녔죠. 흠뻑 빠져 죽었는데도 도로 젖는 기분.
그러나 이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얽혀, 본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처럼 하나의 모양을 구성한 시간의 흐름이 여기 있었습니다.
삶의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고
그 가운데 돌출될 만한 사건은 찾을 수 없으며
남은 시간을 채우는 방법이라고는 좁은 길을 따라 걷는 게 전부인데
절벽 끝에서 삭풍으로 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일 때라도
가자, 지평선 너머로. 설탕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타고 가자.
어둠 다음의 어두움으로, 혹성 저편의 성운으로, 마찰 없는 진공으로 뛰어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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